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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평양냉면, '이야기'로 드시나요 '맛'으로 드시나요?

by 입자 2025. 8. 9.

"이게 무슨 맛이야?"

아마 많은 분들이 평양냉면을 처음 만났을 때 뱉었던 말일 겁니다. 밍밍하고, 심심하고, 심지어는 '걸레 빤 물 같다'는 험한 소리까지 듣는 음식. 그런데 희한합니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하며 수저를 내려놓을 때, 다른 누군가는 그릇째 국물을 들이켜며 '캬' 소리를 내뱉습니다. 이토록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음식이 또 있을까요?

어느새 평양냉면은 단순한 국수 한 그릇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담론'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왜 이 슴슴한 국수 한 그릇에 이토록 유난을 떠는 걸까요?

수도 서울에서 쓰인 '평양냉면의 정사(正史)'

이야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서울의 오래된 노포(老鋪)들이 있습니다. 6.25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 1세대가 수도 서울에 터를 잡고 차려낸 냉면 한 그릇. 그 속에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분단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언론과 미식가들은 '의정부 계열'이니 '장충동 계열'이니 하는 족보를 따지고, 메밀 함량이 높은 툭툭 끊어지는 면발과 쇠고기 육수의 슴슴한 육향을 '정통'이라 부르며 하나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여기에 2018년 남북정상회담은 '평화의 상징'이라는 왕관까지 씌워주었죠.

이처럼 서울의 평양냉면은 하나의 '공식 역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국수 가닥과 국물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자부심까지 함께 먹어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는 한 곳에서만 쓰이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피난민들이 모두 서울로만 향했을까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전국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그중 많은 이들이 모여든 곳, 바로 교통의 요지이자 당시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기도 했던 대전입니다.

대전은 서울과는 다른, 또 하나의 '평양냉면 야사(野史)'가 쓰인 무대였습니다. 서울의 가게들이 '정통성'이라는 담론의 중심에서 주목받는 동안, 대전에 정착한 실향민들은 조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수도권 미식가'들의 평가보다, 당장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대전 이웃들의 입맛이 더 중요했습니다. '슴슴함의 미학'을 설파하기보다, 낯선 타향 사람들도 "아, 맛있다!"하며 반갑게 맞아줄 한 그릇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전 평양냉면의 독특한 특징이 탄생합니다. 서울의 노포들이 쇠고기 육수의 은은함을 고집할 때, 대전의 숯골원냉면은 꿩으로, 원미면옥은 닭으로 육수를 냈습니다. 쇠고기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직관적인 감칠맛을 내는 재료들이죠. 처음 먹어도 고개를 갸웃할 필요 없이, 입안에 착 감기는 깊은 맛. '이해'하거나 '터득'할 필요가 없는, 그 자체로 완결된 '맛있는' 요리였습니다.

이야기보다 맛의 본질에 집중한 결과물. 이것이 바로 대전 평양냉면이 가진 힘입니다.

 

당신의 '최고의 평양냉면'을 찾아서

대전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평양냉면의 역사는 서울이라는 단 한 권의 책이 아닌, 전국 각지에서 쓰인 여러 권의 책이라는 것을요.

대구의 70년 노포들(대동면옥, 강산면옥)이 지켜온 묵직한 내공도, 밀면의 도시 부산에 깃발을 꽂은 부다면옥, 담미옥 같은 신흥 강자들의 세련된 맛도, 광주(광주옥1947)와 울산(풍로옥)에 뿌리내린 또 다른 맛들도 모두 저마다의 가치를 지닌 '평양냉면'입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수도 서울에서 쓰인 장대한 '이야기'를 맛볼 것인가, 아니면 전국의 도시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완성해 낸 '직관적인 맛'을 즐길 것인가.

정답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슴슴한 육수 한 모금에 담긴 실향민의 애환이 최고의 맛일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진한 닭 육수의 감칠맛이 최고의 행복일 수 있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이것 아닐까요? 평양냉면이라는 거대한 이름값에 짓눌리지 않는 것. '평알못'이라 주눅 들지 않는 것. 그리고 결국, 내 혀가 가장 즐거워하는 한 그릇을 찾아내는 여정 그 자체를 즐기는 것.

그래서 오늘, 당신의 혀는 어떤 평양냉면을 기억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