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상에는 수많은 부탁이 오고 갑니다. 커피 한 잔을 사러 가는 동료에게 “내 것도 한 잔만” 하고 부탁하는 가벼운 일상부터, 조금 더 복잡한 도움이 필요할 때까지. 그중에서도 유독 자주 쓰이는 마법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이왕 하는 김에’입니다.
표면적으로 이 말은 참 효율적입니다. 어차피 가는 길, 어차피 하는 일에 작은 수고 하나를 더 얹는 것뿐이니까요. 서로 돕고 사는 세상에서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왕 하는 김에’는 우리의 수고를 덜어주고 관계에 윤활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어떤 ‘이왕 하는 김에’는 고맙고 반갑지만, 어떤 경우는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듯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저 일이 하나 늘어난 것 이상의 불편함. 오늘은 이 미묘하고도 복잡한 감정의 정체를 조심스럽게 따라가 보려 합니다.
계획된 여정에 뛰어든 예상치 못한 변수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그 일에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 집중력의 총량을 계산합니다. 마치 여행 가방을 싸듯, 딱 필요한 만큼의 짐을 꾸려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는 것과 같죠.
그런데 순조롭게 달리던 길 위에서 “가는 김에 다른 도시에도 잠깐 들러줄래?”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어떨까요?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변함이 없는데, 경로에 없던 ‘경주’가 불쑥 끼어드는 순간, 우리의 머릿속은 복잡해집니다. 전체 이동 시간은 얼마나 늘어날지, 예상치 못한 비용은 없는지, 원래 계획했던 부산에서의 일정에 차질은 없을지, 수많은 계산이 다시 시작됩니다.
이는 단순히 일이 하나 추가된 것 이상의 ‘교란’입니다. 잘 짜인 계획의 리듬이 깨지고, 정신적 에너지가 분산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광주에 다녀와 줘’라는 부탁을 받는 것보다, 부산 가는 길에 ‘들러달라’는 요청이 더 당혹스럽고 부담스러운 이유입니다.
내 노력의 가치는 얼마일까?
이 부담감은 단순히 ‘일이 늘었다’는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 내 노력의 ‘가치’에 대한 문제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 소주 공급가가 100원 올랐다는 이유로 식당들이 판매가를 1,000원씩 올렸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올리는 김에 너무 많이 올린다”며 씁쓸해했죠. 100원이라는 명분을 징검다리 삼아 900원의 이익을 더 취하는 구조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었을 겁니다.
‘이왕 하는 김에’라는 부탁도 이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하나의 독립된 일로 존중받아야 할 노력이, 다른 일에 엮이는 순간 ‘덤’이나 ‘사은품’처럼 그 가치가 희석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나의 시간과 수고가 정당한 가치로 평가받지 못하고, 다른 일에 ‘묶음 처리’되며 후려쳐진다는 느낌. 이 미묘한 박탈감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보이지 않는 힘의 방향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더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누가 누구에게’ 이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보통 수평적인 관계나 도움을 청하기 편한 상대에게 이 말을 건넵니다. 하지만 이 경계가 권력 관계 속으로 들어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소위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갑’에게 “이왕 부산 출장 가시는 김에, 이 서류 한 장만 좀 같이 전달해 주시겠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는 너무나 흔합니다. 그 부탁이 합리적이든 불합리적이든, ‘갑’의 편의를 위해 ‘을’의 시간과 노력이 동원되는 일 말입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비극은 여기서 발생합니다. ‘갑’이 ‘을’의 거래처에 가는 길에 서류 한 장을 전달해 주는 것은 조직 전체적으로 엄청난 효율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을’은 ‘혹시라도 귀찮아하시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에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결국 따로 비용과 시간을 들여 부산으로 향하는 비효율을 감수합니다.
결국 이 문제는 ‘배려의 비대칭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누군가는 너무 쉽게 자신의 편의를 요구하고, 누군가는 상호 이익이 되는 효율적인 제안조차 두려워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미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탁하는 사람의 ‘지혜’와 부탁받는 사람의 ‘용기’가 함께 필요합니다.
부탁하는 입장이라면, 먼저 상대방의 수고를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정말 ‘하는 김에’ 가능한 작은 일인지, 상대의 노력에 비해 내 편의만 챙기는 건 아닌지 잠시 생각해보는 것이죠. 그 후 ‘이왕 하는 김에’라는 말 대신 “혹시 가능하다면”과 같이 조심스럽게 묻고, “어려우면 편하게 거절해도 괜찮다”는 선택지를 주는 것만으로도 부탁은 존중이 담긴 제안이 됩니다. 여기에 “덕분에 시간을 아꼈다”는 구체적인 감사와 작은 보상이 더해진다면 관계는 더욱 단단해질 겁니다.
반대로 부탁을 받았을 때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 감정을 존중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속이 좁은 게 아닐까 자책하기보다, 내 시간과 노력을 지키려는 자연스러운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무조건 거절하기보다 “지금은 시간이 부족하니 나중에 봐도 될까?”라거나, “그건 별개의 일이니 다음에 따로 이야기하자”는 식으로 상황을 ‘조율’하려는 시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런 솔직함이 쌓여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건강한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결국 ‘이왕 하는 김에’라는 말 한마디는 우리에게 관계의 본질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각자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는지, 아니면 고유한 시간과 노력을 지닌 ‘존재’로 존중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작은 배려와 약간의 용기가 모여, 서로에게 부담이 아닌 힘이 되어주는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길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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